[아름다운 人터뷰] 오늘에 귀 기울이며/ 두봉 주교

“기쁘고 떳떳하게.” 경북 의성군 문화마을에 위치한 두봉(레나도·René Dupont) 주교(94)의 거처에 들어서면 벽면 한구석을 채우고 있는 이 글귀가 내면의 여백까지 채워준다. ‘두봉 천주교회’라는 문패가 걸린 그의 집이자 성당인 이곳은 성당이 없는 작은 동네를 위해 작지만 큰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가난의 영성을 강조하며 농민과 빈자를 위한 사목에 헌신해온 그는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일념으로 70년 삶의 서사를 한국에서 써 내려갔다. 평생 낮은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그의 겸공한 발자취를 따라 이 열린 공간에서 오늘에 귀 기울이며 내일을 넌지시 내다본다.

“기쁘고 떳떳하게, 이 말은 제 신념이라고 할까요? 이왕이면 기쁘고 떳떳하게 열린 마음으로 살면 좋지 않겠는가. 적당한 말과 행동으로 나서거나 피하고 싶진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종교가 있든 없든 삶의 중요한 태도니까요. 떳떳하게 양심적으로 살면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나거든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난과 전쟁의 현실을 정면으로 통과하게 된다. 비록 가난한 농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마음만은 항상 풍족했던 가족의 온기를 떠올리며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집안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어요. 지금까지도 동생이 사는 모습을 보면 가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에요. 평범한 서민이라 늘 돈을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죠. 가까운 식구들은 한 번도 제가 사는 이곳에 오진 못했어요. 그렇게 먼 여행에 돈을 쓸 여유가 없었거든요. 유일하게 질녀, 그러니까 형님의 딸 중 한 명이 한국을 방문했죠. 생각해 보면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원래 우리 식구는 부모님, 형, 누나 둘, 저, 남동생이었는데 부모를 잃은 4살, 7살 사촌동생들을 아버지께서 같이 키우겠다고 집에 데려오셔서 5남매에서 7남매가 됐죠. 9명 대식구가 됐으니 참 다복했어요, 제가(웃음).”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인 그는 휴전협정 한 달 전인 1953년 6월, 한국에 발령되었다. 이후 배를 타고 떠나는 2달 반의 여정 끝에 1954년 한국 땅을 밟았고, 12년간 대전교구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 “희생보다는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그가 전쟁의 폐허와 상처로 남겨진 한국과 맺은 첫 인연은 친한 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6.25가 일어났을 때 저도 군인이었어요. 당시 프랑스에서도 한 부대를 한국으로 파병하기로 했는데, 저는 신부가 되기 위해 지원은 못 했고, 친한 친구가 했죠. 선뜻 말릴 수도 없고 또 좋은 일이라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한국에서 전사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예요. 그래서 한국으로 발령 나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웃음). 친한 친구가 먼저 밟았고 묻힌 이 땅에서 정성껏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다며 기쁘게 왔죠. 이왕이면 도움을 많이 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성소(聖召)의 꿈을 품고 사제의 길을 걸어온 그의 정신적 유산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26살에 머나먼 타국으로 떠난 아들에게 힘이 되고자 32년간 매주 편지를 보내신 아버지와 이에 보름마다 응답한 그는 먼저 가족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했다. 아흔이 되던 해까지 육필로 따스함을 전한 아버지는 마지막 편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성애를 힘껏 담아내기 위해 흔들리는 필체를 겨우 붙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셨는데, 마지막 편지를 보면 겨우 일어서서 쓰신다고 적혀있어요. 1986년 5월 9일에 쓰셨고, 그해 9월에 돌아가셨죠. 원래 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셨는데, 몸이 많이 편찮은 상태여서 몇 마디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대목에는 밑줄을 그어뒀는데, 사실 내용은 평범해요. 누님, 농사 등에 관한 거죠. 무엇보다 그 상황에서도 편지를 보내신 것 자체가 너무 감동이에요.”

1969년 주교품을 받고 유교적 전통의 뿌리가 깊은 안동에서 초대 안동교구장(1969~1990)을 맡은 그는 신뢰와 화합을 토대로 교구의 초석을 닦았다. 가톨릭농민회 설립, 농민회관 건립 등 농민 인권 신장을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이 과정에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일명 ‘오원춘 사건’(1979)으로 강제추방출국명령을 받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 교육 증진을 위해 상지여자전문학교(現 가톨릭상지대학교)와 상지여자중·고등학교를, 한센병 환자를 위해서는 다미안 의원을 설립했다. 학창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한 그는 빈자와 농민, 노동자의 처지에 공명하며 성심성의껏 손을 내밀었다.

“대전교구에서 청년들과 했던 JOC 활동도 기억나요. 당시 방직공장 근로자들은 24시간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고된 노동을 했어요. 그래서 관찰-판단-실천, 이 3단계를 거쳐서 그들을 도우려고 했죠. 주님과 같은 눈으로 관찰하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판단하며 주님과 같은 손가락으로 실천하는 거예요. 우리들도 기뻤고, 근로자들도 일에 보람을 느끼며 의미를 찾게 됐죠.”

그의 한국 이름은 두봉(杜峰). 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이었던 오기선 신부(요셉·1907~1990)가 지어준 이름으로, 프랑스 성의 뒤퐁(Dupont)과 음이 유사하기도, 중국의 시성 두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의미적으로는 두견새 두(杜)와 봉우리 봉(峰)이 합쳐져 ‘두견새가 우는 봉우리’이다. 이 두견새가 우는 봉우리에는 종교를 떠나 다양한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그의 겸허하고 견실한 삶의 자세에서 위로와 위안의 참된 언어를 찾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저도 한국인이라(복수국적) 한국인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봐요. 요즘 사회 분위기로는 나쁜 소식이 더 많은데, 자연을 보면 어느새 햇빛이 나고 비가 오듯 좋은 점을 찾아 긍정적으로 살 필요가 있죠. 행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행복을 생각하지 않아야 해요. 행복은 외부 조건이 아닌 내면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죠. 생각에만 머물지 말고 실천하다 보면, 또 주면 줄수록 베풀면 베풀수록 행복이 찾아와요. 마치 선물을 받듯이(웃음).”

사순시기 명동성당에서의 강론들을 모은 책 <가장 멋진 삶>(2011)에서 그는 “멋지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며 행복을 화두로 꺼냈다. 오래 사는 것보다 멋지게, 곱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간의 길, 인생의 길은 어디에 닿아야 할까. 우리는 오늘(Present)이라는 선물(Present)을 받아들고 그 길 위에 서 있다.

글. 사진 김신영 편집장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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