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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스토리] 어떤 향기 약(藥) / 황구일, 조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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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아날로그스토리] 어떤 향기 약(藥) / 황구일, 조향사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아날로그 스토리 

 

어떤 향기, 약(藥)

 

황구일, 조향사 

 

9월 가을바람, 걸어서 출근하기에는 이마와 등에 땀방울이 과하게 맺힐 날씨. 첫 외국인 손님을 맞이했다. 예약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문자에도 아무런 답장이 오질 않아 ‘과연 올까’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던 그녀. 동양화 몇 점, 고막을 진동시키는 외국 힙합 노래, 어두컴컴한 지하를 때로는 강렬히 때로는 은은하게 비춰주는 조명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 까만 모자를 푹 뒤집어쓴 소녀가 등장했다. 어눌한 말투,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자리에 앉는 그녀. 내가 건넨 조향 안내 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느라 모자를 살짝 젖힌 그녀는 예뻤다. 내 공방을 다녀간 손님 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때는 몰랐거늘 소녀의 손목과 발목은 조금 통통해서 ‘중국인은 역시 뼈대가 굵은가보다’ 생각했다.  

“어떤 향기를 만들고 싶으세요?”

“잘 모르겠어요.”

어떤 향기를 만들고 싶은지 주제도, 콘셉트도 쉬이 잡지 못하던 그녀. 그러나 명색이 조향사, 다수의 강의를 경험한 내게는 이미 짜인 레퍼토리가 있다. 수많은 향료 앞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와 나 사이에 나름 다정했던 내 강의가 이어졌다. 시향을 할 때 주의사항을 뒤로하고 그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자유로이 내가 준비한 향료들을 하나하나 맡아보기 시작했다. 섬세하면서도 어딘가 더디게,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내 눈을 마주하며 별안간 소리를 냈다. 

“계피도 있어요?”

시나몬, 한때 즐겨 사용하던 계피향은 안타깝게도 모두 써버린 상태였다.

“아… 이런, 정말 죄송해요. 마침 계피향이 다 떨어졌어요.”

곤란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대뜸 팔찌를 찬 왼쪽 손목을 들이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거요, 경복궁? 궁전? 갔을 때 막….”

나는 차분하게 “네에~” 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약방, 약방에서 나는, 건데….”

“막… 이렇게, 주머니… 허리에…”

손짓 발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소녀. 그 모습은 왠지 절실해 보였다.

“향낭이요.”

영업용 미소, 내 기억 속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 그녀가 맞이한 내 미소는 그보다는 조금 따뜻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녀의 통통한 팔목에서는 백단향과 한약재가 어우러진 보드랍고 씁쓸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아! 한약방 냄새가 만들고 싶으세요?”

정말로,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고 나 또한 미소를 지었다. 방향이 정해졌으니, 노를 저을 차례였다. 바질, 백합, 편백나무, 참나무, 바닐라, 통카 빈 향기가 자칫 너무 써서 이 작은 소녀가 뿌리기에는 무겁지 않을까 싶어 내가 따로 제공한 레몬향까지. 스파츌라(시약을 혼합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젓는 소녀의 손길에는 기대감이, 입가에는 미소가 생생히 걸려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이번에도 대답 대신, 그 작은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고는 고개만 왕왕 흔드는 그녀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성공했다’는 성취나 만족감 따위를 기름종이로 덮어버리듯, 뭉클한 마음이 늑골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제 제목을 지어주셔야 해요. 직접 쓰신 제목대로 라벨링을 해드리거든요, 병에다가 이렇게, 여기 쓰인 이름을 붙여 드려요.”

창작의 고통 속에서 잠깐을 망설이던 그녀가 써 내린 답안지는 바로 ‘약(藥)’이었다. 그 글자를 보고 느낀 뭉클함, 어딘가 아린 감정은 들어올 때 진작 그녀를 좀 더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한 발자국 뒤에서야 솟아난 인류애였을까. 조향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한참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단 한 층의 계단을 쉽사리 오르지 못하던 그녀, 들어 올리다시피 부축해 주었던 그 퉁퉁 부은 팔걸이 언저리에서의 은은한 한약방의 향기. 그녀가 만들어간 것은 단지 향수가 아니라 약이자 아프지 말아 달라는 부적이 아니었을까.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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