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 사람] 내가 가는 길 / 박미경 한의사

스튜디오에 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출연자를 비추는 방송 카메라 중 하나의 렌즈 위에 현재 촬영 중임을 알리는 붉은 램프가 들어오면, 나는 검은 렌즈 속으로 시선을 맞춘다. 대낮처럼 밝은 무대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속 같은 그곳을 들여다볼 때면 나는 20년 전의 과거와 만나게 된다. 지금은 10년 차 한의사지만 20년 전의 나는 신인 연기자였다. 나는 90년대 후반,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초록빛 담쟁이가 서양식 벽돌 건물을 뒤덮은 신촌 캠퍼스의 고풍스러움과 전국에서 호프집이 가장 많았던 신촌역 앞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뒤섞여 묘한 향수를 자아내는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사실 학교에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했던 나는 오히려 학교 밖에서 겉돌던 시간이 많았다. 무료했던 내게 잡지사 전속모델 공고를 본 한 친구가 지원을 권유했다. 중앙일보사의 쎄씨’ 4기 전속모델 대회 소식이었다. 친구가 대충 찍어준 스냅을 제출했는데 의외로 통과하여 실제 대회까지 나가면서 뷰티 모델을 시작했다. 이후 잡지에 자주 등장하자 모델 에이전시에서도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밀레니엄 분위기를 타고 사이버 가수 아담이 활동했고, 뒤이어 사이버 여가수 류시아도 나오게 된다. 내 얼굴을 석고로 뜨고 촬영을 해서 류시아를 만들었고, 이 일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덕에 음반사에 소속되어 연기자까지 도전했고, 신인 연기자가 거치는 프로그램들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게도 드라마의 고정 역할이 생겼다. 수많은 오디션 끝에 맡게 된 배역은 KBS2 어린이 드라마인 벡터맨2’의 악역, 지구를 침공하는 메두사 사령관 역할이었다. 감독님께서는 예쁜 사람이 악역을 하는 거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셨지만, 처음 갖게 된 배역이라 마냥 좋았다. 영화판을 먼저 찍고 TV시리즈를 찍었는데, 메두사 역할을 하면서 연기의 기쁨과 연기자로서의 책임감도 알게 되었다. 이 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송되면서 MBC 주말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왔는데, 그 소식에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방송 3사가 시청률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시대였고, 주말드라마의 주요 배역이란 전 국민이 아는 얼굴이 된다는 뜻이었다. 큰 결심 없이 해오던 일이 평생 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나 자신이 좋은 연기자가 될 재목은 아니라는 냉정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곧바로 벡터맨에서 받은 출연료를 한 학기 등록금으로 납부하고 복학을 했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를 결단력이 있는 대단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흘려보내듯 낭비해버린 느낌에 부끄러웠다. 취직을 준비하다 보니 이제는 IMF로 인한 경제 침체로 사회도 어려워져 있었다. 우리 가정 경제 또한 다 무너져 있었고, 나는 무력했다. 하지만 두 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라는 말처럼 나는 다시 평생 직업을 찾기로 했고, 힘든 사정에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신 어머니 덕분에 재수학원에 갈 수 있었다.

허약 체질로 고생했던 나는 학창시절 잠이 너무 많았고, 온몸의 살이 아프고 코피를 자주 쏟았다. 그때마다 병원에 가도 별 이상 없다는 진단뿐이었지만, 한의원에서 한약을 지어먹으면 씻은 듯이 낫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약한 체력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 한의사가 되어 내 몸도 고치고 사람들의 병도 낫게 하며 살자.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도 힘을 키우자라는 생각으로 다시 입시에 도전했고 03학번 한의대생이 되었다.

나는 늘 운이 좋다고 나 자신을 평가한다. 워낙 긍정적이라 좌절도 금세 잊어버리니 행운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은 40대가 넘어가면서 내면의 불안감으로 변했다. ‘정말 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혹시 놓치고 있는 건 없나?’ 근래에 나에게 찾아온 큰 행운은 방송을 통해서도 많은 분들께 다가갈 수 있는 브라운관의 한의사가 된 것이다.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선언처럼 나의 감각 기관은 미디어를 통해 확장되어 전국의 수많은 환자들과 가상의 진료실에서 만나는 셈이다. 과거 방송인으로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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